중학교 때 도덕(윤리)책인가 국어책이던가에 “된 사람, 든 사람, 난 사람”이라는 글이 있었다. 그 글을 공부한 우리 세대가 아니더라도 제목만 보면 어떤 내용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군부독재 시절의 교과서긴 했지만, 당시의 교과서에는 살아가면서 기억나는, 쓸 만한 파편들이 제법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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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도덕책에 철저하게 비판일색으로 소개되었던, 그래서 마치 공산당, 그것도 이북괴뢰정권―내 표현이 아니라 당시의 일반적인 표현이다― 배후의 원흉이 되어버렸던 마르크스이론 교육은 사상이라는 것이 전혀 영글지 못했던 어린아이에게 잘못된 인식의 세뇌를 시키기에 충분했다. 고교시절부터 사상서와 철학서적들을 나름 [학생들의 평균보다는 많이] 접하지 않았다면 나 역시 우리가 배웠던 북한주민들과 다를 바 없는 잘못된 세뇌교육의 착실한 결과물이 되어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세뇌됨의 측면에서 북한주민이나 [전국 방방곡곡, 외지까지 장악하고 있는 조·중·동 언론의 논리에 세뇌되어 버린] 남한주민이나 근본적으로 다를 것 없다는 생각을 감히 해본다. 물론 경제적인 우월함으로 인해, 다방면으로 경제력이 허용해온 만큼의 보다 나은 계몽(啓蒙)은 있었고 그 덕분에 북한보다 깨인 사람, 시쳇말로 말 많은 반동이 더 많을 뿐이다.
‘말 많은 반동’에 속할 정도로 말을 하지는 않지만, 조·중·동적인 시각을 주류로 보는 한, 나 역시 주류의 눈에선 반동에 속할 것이다. 요즘은 이러쿵저러쿵 말 많으면 무조건 좌빨이라고 하더라. 얼마 전 시사평론가 김 용민 씨가 피가 펄펄 끓어야할 [요즘] 20대의 철저한 현실타협적인 태도를 비난하는 논조의 글을 써서 당사자인 20대를 막론한 상당한 사람들로부터 심지 날카로운 공격을 받은 적이 있다. 나 역시 주위에서 보는 현실을 감안하여 내심 그의 논조에 부분적으로 공감했고 부분적으로는 우려를 제기했지만, 정작 20대 초반인 우리 딸아이는 김 용민 씨의 글을 읽더니 나 보다 더 공감했다. 흥분을 했든 공감을 했든 김 용민 씨의 글에 자발적이고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 20대는 적어도 그가 우려한 20대에 속하는 사람들이 아닐 것이다. 흥분하거나 반성하는 그들은 나름대로―그들의 방식으로― 피 끓는 젊은이들인 것이다.
학계도 크게 다를 것 없긴 하지만 학계를 떠나서 보는 현실은 생각보다 더 한심하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를 번갈아가며 봤다는 집안에서 자란, 내가 아는 대학원생 한 사람은 ‘제목만으로도 비판적 사상서인 듯싶은 책은 만져 보지도 않았다고’ 하면서(무슨 자랑도 아니고), 한겨레와 경향신문은 빨갱이신문이 아니냐고 한다(헉!). 인문계 학생인 그가 대체 어떤 주제로 석사논문을 쓰고 통과했는지 궁금하다. 또 한 예로, 비록 미술을 전공했지만—그래서 인문사회학적인 공부들과는 소원했더라도— 대학까지 나왔으며, 사업을 하는 남편을 둔 한 친구를 얼마 전에 만났는데, 아무리 인터넷과 소원하고 산다지만, 그 친구는 조·중·동이 무슨 말인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정치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이야기 중에 자연스레 조·중·동이라는 표현이 내 입에서 튀어나왔는데, 그 아이가 조중동 ‘그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 일순 나는 경악했다. 내 의식은 그 순간 이미 기절했다. 친구 왈, 지금까지 20년 넘게 조선일보를 봤는데 이번에 중앙일보로 바꿔볼까 하는 중이란다. 이쯤 되면 그 친구와 나는 시사적인 면에서 단 한 문장의 공통분모도 없으리라 생각해도 된다. 결국 오랜 죽마고우와 적대적인 남이 되지 않으려면 만나서 할 수 있는 이야기란 그야말로 ‘밥 먹고 사는’ 이야기뿐이다. 밥 먹고 사는 이야기조차도 극히 피상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세상이야기를 하려면 상대가 평생 조·중·동만 읽어온 사람인지 아닌지 부터 살펴야 할 정도다. 시쳇말로 말이 씨가 안 먹힌다. 6-70년대의 북한주민 앞에서 김일성 주석의 욕을 하는 꼴이다.
세뇌가 얼마나 무서운지, 그러니 왜 기득권이 자라나는 학생들의 자유롭고 광범위한 독서를 훼방 놓아야 하는지 알만하지 않은가. 생각 없이, 시험성적이나 토익점수 등, 내미는 숫자만 높은 무뇌아들만 생산하면 그들로서는 ‘딱’인 것이다. 그래도 원래 똑똑하게 태어난 놈들은 성적이 좋든, 적당한 성적만 받든 간에, [부모의 성향과 관계없이, 기성세대의 훼방에도 꿋꿋하게] 스스로 찾아 읽고 공부하기도 한다. 그러나 ‘절대다수가 그렇지 못하다’는 현실이 무섭다. 문제는, 계속 배우고 연구하고 있는, 딴엔 지식인이라고 깝죽대는 사람들도 상당수가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물론 의견이 다르고 사상이 다를 수는 있다. 하지만 그들 중 상당수가 조·중·동의 수십 년 독자들이고, 거의 모든 사안에 대해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하나같이 조·중·동이 펼친 논지의 답습이며, 하다못해 가십거리까지(!) 조·중·동 논지로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대할 땐 기가 찰뿐이다.
어릴 적 우리 집에서도 조·중·동 신문을 봤다. 주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번갈아 봤던 기억이 난다. 예전에는 정권에 빌붙기는 했어도 이 정도까지 발악하는 수준은 아니었지 싶은데, 어쩌면 당시에는 그들과 대적하는 반대 언로가 지금보다는 대단치 않아서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나름 비판적인 논자들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고 생각하는 건 미성숙했던 시절에 대한 기억의 전횡 탓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어린] 나는 어김없이, 경향이나 서울신문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특히 경향신문은 사상적 비주류로 간주했다. 지금 생각하니 내가 왜 그랬는지 알겠다.“고마우신 우리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 길이길이 이 역사에 빛나오리다...” 라는 개사된 노래를 부르며 고무줄놀이를 했던 시절이었고, 유신헌법 개헌 때는 학교 선생님께서 그 어린 초딩들에게 ‘집에 가서 부모님들께 꼬옥(!) 찬성투표를 해야 한다고 말씀드리라’는 교육을 시켰던 기억이 난다. 열 살의 나는 정말 유신이 아니면 우리나라가 망하거나 당장이라도 빨갱이가 쳐내려 와 적화통일이라도 될 줄 알았다. -.-
학교에서 착실하게 세뇌를 받고 있던 딸을 기르시던 아버지는 평생 야당 편이셨다. 아버지의 사무실에는 조·중·동을 위시하여 한국일보, 서울신문, 경향신문, 지방지 등, 당시 강릉에서 배급되는 거의 모든 종류의 일간지가 다 있었다. 순수한 사업가일 뿐이셔서 당원활동을 하신 적도 없고, 크게 정치에 민감한 사업을 하신 것도 아니라 정치와는 상관없이 사신 내 아버지의 논리는“우리나라처럼 여당이 비정상적으로 막강한 나라의 국민일수록 야당을 지지해줘야 한다는 것, 한 목소리가 세상을 장악하지 않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라는 것”이었다. 대다수 강원도민이 박 정권의 절대적인 지지자였던 당시에, 아버지는 유신헌법에 반대투표를 던졌고 유신 직전의 대선 때는 김대중 씨에게 표를 줬다. 아버지는 어린 자식 앞에서 당신의 정치견해나 성향을 이야기하신 적이 없었지만, 엄마와의 대화를 통해 대충은 알 수 있었다. 김대중 씨가 ‘인격적으로 얼마나 부족한 사람이며, 사상적으로 얼마나 불온한가에 대해서만’(우리시대의 황색언론이 어땠는지 기억하는 사람도 많을 거다) 듣고 읽었던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그런 아버지의 투표성향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언젠가도 이야기했지만, 그 분은 초등학교 5학년 딸아이의 생일선물로 헤르만 헷세 전집을 사주셨던 대단한 팔불출이시다. 내 사상―사상이라고 말할 것도 없지만―에 변화가 오기 시작한 건, 조금 심도 있는 문학을 읽기 시작했던 그 무렵부터였고, 점차 문학을 벗어나 사상서나 철학을 읽기 시작하면서 고등학교 무렵에 이르면 딴엔 거의 [우스꽝스런] 세계주의자가 되었다. (시작과는 이미 딴 소리 중인데, 또 다른 딴소리로 가려하니, 그만하고!)
후일 아버지께 들은 여담인데, 박 정권의 독재가 극에 달했을 무렵, 유세차 강원도에 내려 온 야당총재 일행에게 선뜻 차를 빌려주는 사람이 없었단다. 당시 강원도의 험한 지세를 뚫고 유세를 다니기엔 그 분들이 타고 온 승용차로는 상당히 무리가 있어 지역주민들의 지프가 필요했던 것이다. 당시 강원도에는 지방의 험한 지세 탓에 대개 지프 자가용이 많았다. 우리 집도 산길, 시골길까지 자유롭게 누빌 수 있던 지프를 소유했다. 70년대 중반만 해도 강릉 같은 소도시에서 자가용을 소유한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의 가정환경 조사에서도 자가용을 소유한 집은 우리 집을 포함해 전교에서 단 세 집이었던 걸로 기억한다(물론 크지 않은 학교였던 탓도 있겠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아버지에게도 부탁이 들어왔고 아버지께선 서슴지 않고 당신의 지프를 야당총재 일행에게 내주셨다(그 사람들이야 기억도 못하겠지만). 변절을 했든 말든, 지금이야 망령 같은 헛소리를 하든 말든, 당시의 야당과 제도권 민주주의는 어쨌거나 그 사람의 어깨 위에 놓여 있었다.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아버지는 단 한 번도 당신의 소신을 굽힌 적이 없었고, 사업도 당신의 옹고집 때문에 말아먹었으며, 그런 면에서 어머니는 평생 마음고생을 하다가 돌아가셨다. 어찌됐든, ‘소신’이 삶을 망쳤든 말든, 한창 자라던 사춘기에 딴에는 지독한 좌절을 경험했든, 그놈의 ‘소신’ 때문에 우리는 아버지를 미워할 수가 없다. 아버지의 또 다른 소신은 [내가 종종 이야기했듯] 가장의 ‘철저한’ 책임감이었기에.
암튼 그래서인지 70대 중반을 넘기신 아버지의 참정권 행사는, 대선이든 국회의원 선거든, 지방선거든 지금까지 당선 유효투표가 된 적이 다섯 손가락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 중년까지는 온순한 성향이 주류이던 강원도민이셨고 그 이후론 경상도에 거주하셨으니 야(野)성향을 지닌 아버지의 표가 당선자를 지지하게 되기란 힘드셨을 거다. 어떻게든 불편부당을 지향하고자 하는 내 성향은 그렇게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아버지도 나도 보수주의자의 영역에 속해 있다. 사실 그들이 [감동스럽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엔간히만 정치를 성실하게 했다면 아마 지금의 여당 지지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나와는 달리 진보적인 동생부부는 한때 전교조에 속했고, 순수하게 교육개선만을 지향하여 전교조를 나온 이후론 환경연합 운동을 하고 있으며, 개인적인 정치성향으로는 진보신당 지지를 천명한다. 그래서 그 아이들은 여태껏, 이야기는 서로 통했으되, 나와는 조금 다른 정치색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 다수의 건전한 우익은 침묵하고 ‘우익을 가장하여 기득권을 사수하려는 부도덕한 세력’이 내가 30년 전에 보았던 그 작태를 다시 보여주고 있는 바람에 정치적 무관심을 유지하고 있던 내 마음이 본의 아닌 진보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속은 연일 부글부글 끓어도, ‘대화’를 배우지 못한 세대―엄격히 말하면 나도 포함된다―의 많은 지인들과 반목하지 않기 위해 나는 여전히 침묵하는 다수에 속한다. 여기 개인 블로그에서조차 가급적 정치, 사회적 이슈를 들먹이지 않는다. 사실 그 분야는 내 영역이 아니다. 수년전 모 지방지의 독자위원으로 일 년 정도 시사적인 칼럼을 쓴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정말이지 시사평론 쪽은 나와 맞지 않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일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나보다 더 똑똑한 사람들이 워낙 많으니 그 분들이 목소리를 제대로 내 주면 되는 일이고, 나는 다만 [침묵이 부정과 불의를 조장하는데 일조한다는 비판에 반성하는지라] 최소한의 의무, 이를 테면 참정권 행사나, 여론조사설문참여, 이슈에 대한 서명운동 참가 등의 가장 기본적인 행위에만은 의무를 다하고자 노력한다. 그래서 이따금 걸려오는 여론조사전화 같은 것에도 성심껏 내 견해를 밝힌다. 아끼는 동생이 근무하는 여론조사기관에서도 몇 번 전화를 받은 적이 있는데, 그 곳에서 걸려오는 전화에는 의식적으로 친절하게 답하려고 애쓰기도 한다.*^^* 어쨌거나 비겁한 나는 소신을 큰소리로 천명하거나 믿는 바대로 적극적인 행동을 하지 못한다. 소심한 겁쟁이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껏해야 이런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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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개인사와 사적인 사념/상념으로 채워지는 내 블로그는 독자층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RSS에 등록할 필요가 없다. 무작위 독자층을 대상으로 하다보면 사고(思考)에 있어 운신의 폭이 좁아지기 마련이다. 함부로 이야기할 수도 없고 내면을 여과 없이 뒤집기도 불편해진다. RSS 회피는 물론, 검색과 스크랩도 피하고 있는데도 언젠가 타인의 블로그에서 내 글과 똑같은 문장―한두 문장이 아닌 단락 전체―을 발견하고 기겁한 적이 있다. 일반적인 이슈에 관한 것도 아닌 단순하게 내적인 상념을 풀어낸 문장들이 적당히 쪼개져서 ‘인용이 아닌 그 블로그 주인의 내면적인 성찰로’ 올라 있는 것을 보면서 정말 허탈했다. 아무리 사람들이 비슷한 생각을 하고 산다지만, 토씨하나 다르지 않은 그 문장들은 오롯이 내가 써서 인터넷 카페에 올렸던 글이었다. 알다시피 나 같은 주책도 아무나 부리진 않는다. 만고 쓸 데도 없는 것일망정, 개인적인 감정을 도둑맞은 기분이 좋을 순 없었다. 예전에 도둑맞은 일기와 관련한 이야기인 Thief of Heart 라는 영화도 있었지만, 그건 다른 경우다. 그 도둑은 그 여자의 마음을 훔쳤을 뿐 그것을 자기 것으로 전용하진 않았으니까. 그 영화에서처럼 매력적인 도둑이라면 눈 감아 주겠다만(ㅋ).
포스팅을 하면서 검색금지를 사용하는데도 검색에 걸리는 건 어쩔 수 없나보다. 일전에 만난 한 동생은 차라리 누구나 볼 수 있는 RSS에 등록하면 누가 봐도 본 사람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남의 것을 함부로 전용하지 못한다고 귀띔해 주었지만, 다들 함께 읽을 만한 내용의 글이어야 RSS에 풀어 놓든가 하지(>.<). 내가 무슨 명사나 인기인도 아니고, 친구가 아니라면 내 잡사(雜事)나 생각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 일부러 사서하는 부끄러운 짓은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버겁다. 쓰고 있는 저널이 온전히 사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묘~한 노출심리 내지 소외불안심리 때문에 풀어 놓는 것에 불과하기에, 이해할만한 사람이 아니면 읽어주지 않는 것이 더 감사하다. J도 그렇다고 했듯, 내 블로그에 꾸준히 들락거리는 몇 명의 사람들은 누군지 이미 내가 안다. 그들과는 온라인상으로나마 서로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름으로 오랜 관계를 유지해 온 사람들이라 다소 팔푼이 짓을 하거나 조금 적나라하게 솔직한 이야기를 한대도 덜 부끄럽고,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그들이야말로 내겐 다른 수천수만의 독자들과는 비교가 안 될 속 깊고 소중한 친구이자 독자들이다. 왜냐하면 지나치게 호흡이 긴, 게다가 지적으로나 일상사적으로나 별반 도움이 안 되는 내 잡담의 청자가 되는 일은 상당한 인내심을 필요로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글을 참고 읽어주는 그들이야말로 대단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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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다시피 “된 사람, 든 사람, 난 사람”에 대한 새슬을 풀려고 시작한 이야기가 이렇게 완전히 딴 길로 새어버렸다. 된 사람, 든 사람은 오롯이 자신의 몫이지만 난 사람은 운이 따라야 한다. 그래서 ‘난 사람’은 내 몫이 아니다. ‘든 사람’은 책을 읽고 교양을 쌓는 노력만 하면 될 수 있지만 ‘된 사람’은 피나는 노력으로도 쉽지 않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도무지 속까지 된 사람일 자신이 없다. 이 나이에도 공상에 빠지고 그 공상이 현실화 될 수도 있다는 망상까지 종종 하는 나로서도, 된 사람이 되는 일은 내게 있어서 불가능의 영역임을 잘 알고 있다. 겨우 한다는 일이 된 사람의 허울이라도 그려서 뒤집어 써보자고 애썼지만 그것도 실패했다. 요즘처럼 심정적으로 어려운 일이 닥칠 때면 위선으로나마 된 사람이고자 했던 자신이 철저한 실패자임을 깨닫는다.
(2009년 7월 18일, 버들아씨...)